1980년대 중반 한국의 반도체 제조가 가속화되면서 KAIST에서 김 교수 밑에서 공부했던 엔지니어들이 업계 1위로 올라섰고 대학과 정부기관에서 반도체를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자리도 탐났다. 한국은 21세기 초까지 메모리 칩에 대한 국제 수요의 60% 이상을 충족시키면서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지배적인 강자가 되었다. 김 위원장의 많은 제자들은 1959년에 라디오 세트를 제조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초에 구식 메모리 칩을 생산하던 나라의 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았다.
현재 카이스트의 명예교수인 김씨는 이 성공에 한 역할을 했다. 그는 반도체 공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한국 최초의 교수였다. 그는 평균 키에 30대 중반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김씨는 한국이 최초의 트랜지스터를 생산하기 시작한 1975년부터 교직에서 은퇴한 2008년 사이에 100명 이상의 학생들을 훈련시켜 효과적으로 한국의 반도체 전문가들의 첫 두 세대를 만들었다.
카메라 칩의 시작
김충기는 한국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그의 아버지 김병운은 한국의 상징적인 실과 직물 제조업체인 경방의 직물 엔지니어였다. 김 장로는 회사 최초의 방적 공장 건설을 도왔고, 그의 공학적 감각과 그 후의 명성은 그의 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매일 공장을 견학했어요,”라고 작은 김씨는 회상한다. “그는 그 기계들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그는 어떤 것들이 문제가 있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교훈은 김충-기씨가 “기술자의 마음”이라고 칭하게 된-김충-을 추진할 정신의 씨앗을 뿌렸다.”
대한민국 건국연구소
1975년 봄 KAIS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의 연구실에는 야심찬 석박사 후보자들이 대거 몰렸다. 이 연구소의 인기의 가장 확실한 이유는 한국 학생들이 반도체에 대해 배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라디오, 텔레비전, 전자레인지, 시계를 제조하도록 요구한 골드스타와 삼성과 같은 전자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장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업계는 반도체 전문인력이 부족해 CMOS 시계칩 등 기본 집적회로를 넘어 아직 자체 칩을 양산하지 못했다. 김 연구원의 연구실에 입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20년 동안 한국의 반도체 엔지니어 지망생들이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KAIST의 반도체 교육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이 김씨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멘토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공학을 가르치고 마스터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척했다. 예를 들어, 공학자의 마음은 동등한 부분의 이론과 적용을 필요로 한다는 그의 믿음은 공학을 주로 학문적인 학문으로 본 그의 학생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들은 수학과 독서에 능숙했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진지한 설계나 공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